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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가족을 사랑했나?
■ 이금순 [약력]
조선시대엔 남솔제도가 있었다. 당시에는 관장이 임지에서 직계 자손이 아닌 다른 식구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는 것을 ‘남솔(가족 수 초과)’이라고 해서 파면 사유로 삼기도 했다. 1589년 12월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부임 (서애 류성룡의 탄식처럼 이순신은 조정에서 밀고 당겨주는 이가 없어 과거에 급제한지 14년 만에 겨우 승진)할 때의 일이다. 이순신은 노모(당시 75세)와 함께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조카들(회신, 요신 두 형이 요절)까지 24명 이상의 대식구를 데리고 갔다. 세간에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이순신은 “내 비록 남솔이라는 허물을 쓰고 파직이 될지언정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조카들을 어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순신이 남솔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같이 결단할 수 있었던 원천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 사랑의 정신이 나라와 백성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가족 사랑 정신은 큰 의미를 갖는다. 1596. 윤8. 10. 난중일기에는 식구들이 새벽에 초시(과거의 맨 처음 시험)를 보았다. 아들 면이 쏜 것은 모두 55보, 봉(조카)은 35보, 해(조카)는 30보, 회(아들)는 35보, 완(조카)은 25보라 한다. 진무성이 쏜 것은 모두 55보로 합격되었다. 이 일기를 보면 장군은 아들이나 조카를 똑같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최후를 수습한 사람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 <이순신 저서>의 <이충무공 행록>에는 이순신의 최후를 지켜본 사람은 큰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시종 김이뿐이었고, 송희립도 알지 못했으며, 이순신 대신 북채를 물려받아 친 사람은 회 혹은 완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못난 권력자들이 가족 비리에 연관되어 무너지는 걸 본다. 직위에 이른 사람도 그 직위에 맞지 않는 일을 가족 지키기에 연연해 불법을 자행하는 걸 보고 장군의 가족 사랑의 방법에 대해 한번더 생각해 보게 된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섞인 사랑을 애착이라 하고 분별 없는 평등한 사랑을 자비라 한다. 권력자의 못난 모습은 애착의 결과이고, 아들과 조카를 똑같이 아끼고 대의에 동참시킨 장군의 모습이야말로 사심없는 대자대비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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