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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배 타고 찾아간 인연, 대마도 황룡사
![]() 제주 4.3사건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위해 일본 대마도에 세워진 공양탑 삶은 우연과 필연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이루어지는 한 편의 연극이라고 했던가. 타국 땅에서 살아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내게, 대마도는 어느 날 불교의 인연법처럼 불현듯 다가왔다. 바다를 좋아하던 나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대마도 황룡사는, 불교와 예술문화를 함께 붙들고 앞만 보며 살아온 긴 시간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황룡사는 내 삶의 의미 있는 쉼터가 되어 주었다. 오래전 어느 불자가 대마도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섬에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거기에 무슨 마트가 있겠느냐”며 장난처럼 여겼던 적이 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어느 순간 꿈같은 인연이 이어져, 내가 대마도에 절을 불사하고 살아가게 될 줄을. 이러저러한 인연 끝에 대마도에 도량을 세우기로 결심한 뒤, 처음 찾아간 대주요, 지금의 황룡사는 낯선 곳이 아니었다. 처음 온 곳임에도 오래전부터 살아온 듯 마음이 편안했다. 뒤로는 산이 감싸고, 좌청룡 우백호처럼 뻗은 숲이 앞바다를 살포시 품고 있었다. 포근한 저수지처럼 잔잔한 바다와 배산임수의 형세, 안대가 어우러진 터는 한눈에도 좋은 명당임을 짐작하게 했다. 지금 황룡사의 전신인 대주요는 본래 대마도의 도요지였다. 조선 다완 제작 요청과 관리를 담당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조선에 각종 다완을 요청하고, 오래전 부산요와 왜관을 통해 수출되던 다완을 관리하던 역사적 공간이었다. ![]() 에토씨 고바야시 명인은 직접 빚은 도자기 가운데, 칠순에 국보급 작품들이 전시되는 유명 백화점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작품 여러 점을 황룡사에 보관해 달라며 선물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91세의 연세로 여여히 세연을 거두었다. 그의 선친은 일본 서각의 일인자로, 일본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인이었다고 한다. 동생은 교토의 큰 사찰에서 덕 높은 주지스님으로 지내다 형보다 한 해 먼저 입적하였다. 두 형제 모두 미혼으로 자식이 없었기에, 동생이 주지로 있던 사찰에 세워진 도고 고바야시 명장의 박물관에 작품들이 소장되었다. 그중 일부 작품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황룡사로 보내져 왔다. ![]() 황룡사 주지 보혜스님과 황룡사를 찾은 대학생들이 공양탑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전생의 인연인지, 이생의 인연인지 알 수 없으나, 지중한 인연으로 대주요를 지키는 파수꾼이 된 듯하다. 그 인연 속에서 나는 부처님의 인연법을 깊이 실감하고 있다. 대마도에서 황룡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내가 이곳에 오게 된 뜻은 무엇일까. 그 물음을 화두처럼 품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대마도 지도에서 ‘제주 4·3 공양탑’이라는 글자를 보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제주 4·3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인터넷을 찾아보며 그것이 참으로 아픈 역사임을 알게 되었다.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바다에 수장되어 학살당했다. 당시 제주 해역의 시신들은 동북쪽으로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 곧 대마난류를 타고 약 200km 떨어진 일본 대마도 해안까지 떠내려왔다고 한다. 대마도 북부 사고만 일대로 수백 구의 한국인 시신이 밀려들자, 당시 대마도 주민이었던 에토 히카루 씨를 비롯한 현지 어민들은 그 시신들을 직접 인양하고 수습하였다. 발견 당시 시신들은 손발이 철사나 밧줄로 묶여 있는 등 참혹한 상태였고, 옷에 붙은 라벨 등을 통해 한국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에토 히카루 씨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밀려드는 시신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땅에 묻어 주고 정성껏 넋을 위로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아들 에토 유키하루 씨에게 이 사실을 자세히 전했고, 아들 유키하루 씨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2007년 대마도 사가 지역에 사비로 부지를 마련하고 공양탑을 세웠다. 오랫동안 이 시신들이 어떤 사연으로 죽음을 맞았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2016년 일본 언론의 취재와 재일 학자·시인 김시종 선생, 일본 내 ‘제주4·3 한라산회’ 등의 조사를 통해 이 표류 시신들이 제주 4·3 사건과 예비검속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주검이었음이 세상에 드러났다. ![]() ![]() 공양탑에서 참배 후 생각에 잠긴 주지 보혜스님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대마도 현지에서는 에토 가문과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단체, 제주 4·3 유족회가 함께 모여 ‘제주 4·3 사건 쓰시마 위령제’를 여러 차례 봉행해 왔다. 자국에서도 외면받고 바다에 버려진 희생자들의 주검을 거두어 준 대마도 주민들의 선의가 없었다면, 이 비극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한일 간 인도주의적 연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 제주 4·3 공양탑을 나는 무작정 찾아가 보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공양탑 앞에 서면, 바다 건너 한국 땅이 아련히 보인다. 죽어서나마 그리운 고국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그들을 묻어 준 에토 가문의 마음 앞에서, 감사와 먹먹함이 오래도록 허공에 머물렀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대마도에 와서 처음 인연을 맺은 이가 바로 에토 유키하루 씨였다. 이후 기회가 닿아 황룡사에서 그분께 공양과 차를 대접할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참으로 뜻깊은 인연이었다. 현재 에토씨는 대마도 사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진철, 문진우, 김홍희 작가 등 한국 사진작가들과도 인연을 맺어 대마도와 부산에서 매년 사진전을 열고 있으며, 때로는 황룡사에서 차담을 나누며 지금까지도 따뜻한 친분을 이어 오고 있다. 황룡사는 정기 기념법회와 주요 행사 때마다 스님과 신도들, 한국에서 동참한 불자들과 함께 외로운 영령들을 위한 헌다례를 올리고 있다. 개원 1주년에는 부산영산재보존회 스님 25분과 부산시민 취타대 25분이 함께 대마도를 찾아, 제주 4·3 사건 희생자 공양탑 앞에서 추모 다례재를 정성껏 봉행하였다. 머나먼 타국의 바다에서 억울하게 숨져 간 영가들에게 범음과 범패를 올리고, 따뜻한 한국의 차와 향, 과일과 꽃을 바치며 넋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대마도 주민, 특히 에토 가문이 지켜 온 인도주의적 정신을 한국 불교의 이름으로 기리고 이어 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보람이 깊었다. 황룡사는 또 선조의 딸로서 왜장에게 끌려가 타국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이연왕희의 묘도 자주 찾는다. 그 앞에서 위령제와 헌다례를 봉행하며 역사의 흔적을 알리고, 외로운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전망대에 모셔진 위령탑도 자주 참배한다. 1703년, 숙종 29년에 대마도 파견길에 올랐다가 풍랑으로 희생된 조선역관사 108명의 넋을 기리며 헌다례를 올리고, 바다 위에 남은 아픈 역사를 조용히 보듬는다. 황룡사는 개원 이후 대마도 곳곳에 서려 있는 한국인의 아픈 역사를 위로하는 중심 도량이 되고자 걸어왔다. 인연이 허락되는 날까지, 이 깊은 종교적·역사적 의미를 마음에 새기며 한일 문화교류의 작은 다리가 되고자 한다. 대마도 최초의 한국 사찰 황룡사. 이 도량이 앞으로도 바다를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인연과 화해, 추모와 문화교류의 길을 밝히는 따뜻한 등불이 되기를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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